The Curious Case Of Whom


 
 언니랑 영화보기.
 언니는 집에서 같이 사는 친구랄까.
 
 중고등학교 땐지, 아님 대학때였는지. 너무 오래되어서 희미하긴 하지만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 언니야, 언니랑 동생이라는 것은 가족이기도 하지만... 영원히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친구같아, 그치?" 
 팔짱을 조금 풀어내고 고개를 들어 눈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는데도,
 언니의 반응은 시큰둥했었던 것 같다.
 
 물음을 했었던 나는 깊은 감회에 젖어있었던 것이 상기할 때마다 또렷하다.

 -

 언니가 퇴근길에 전화해서, 지난번에 이야기가 나왔던 영화를 보러가려느냐는 물음에 미련없이 책을 덮고 나갔다.
 영상의학과 레지던트가 되더니 - 요즘은 언니가 집에 매일 오기도하고, 게다가 남들 퇴근하듯이 늦은 저녁즈음에는 나올 수도 있어서 참 좋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다들 시집들 가기전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일 것만 같아서 가끔 울컥하기도 하고.

 내가 살면서 본 대부분의 좋은 영화들은 언니와 함께 본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서로 다르지만, 내 인생에서 경험한 상당한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언니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오늘 일기를 쓰고 싶다고 느낀 것은, 오늘의 영화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늘 쓰지 않으면 오늘의 감정은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늘상 떠올리는 단상이지만 오늘따라, 갑자기 너무나 아쉬워서. 

 눈물 줄줄 흘리며 감명깊게 읽었던 책을 몇년만 지나면 한 줄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기억력으로는
 이 영화는 한 해도 넘기지 못하고 잊게 될 것이 분명하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어언 3시간이나 걸려서 엔팅 크레딧을 올린 이 영화는  
 불이 켜지자 마자 언니를 바라보며
 " 젋은 브레드 피트 보려다가 내가 늙어죽겠다." 라는 농담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영화는 예술인데. 나는 예전부터 '너무 하고 싶은 것이 많은'은 감독의 영화들은 미워하곤 했다.
 이번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기 보다는, 하고 싶은 기술들이 너무 많았다고 본다.
 진지할만하면 너무 인위적인 특수효과들로 피식 웃음이 날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도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바로 옆자리에 치즈 냄새가 진하게 나는 빵을 들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가끔 이렇게 비위가 약한 날이면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극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통스럽다. 아마도 다른 날 이 영화를 봤으면 나는 조금 더 호의적이거나, 아니면 전에 없는 영화를 봤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재밌게 봤어. 추천할만하진 않지만.' 이 정도의 느낌. 영화 관련자들은 나의 이 말을 듣고 서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나의 기분에 따른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사소한 기분이 너무나 많은 것을 좌우한다. 하긴, 첫인상이 인생의 배우자를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무엇을 하든지, 한 번에는 한 가지만 느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본 이 영화에서 인상깊게 느낀 것은 

 벤자민의 일기장.

 기록을 하다보면 두려울 때가 많다.
 가장 두려운 것 중 세가지는,
 
 1.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2. 나의 감정을 솔직히 그대로 기록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3. 위의 두가지를 배제한 글쓰기는 진실한 글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이다.
 
 위의 세가지를 바짝 따라잡을 다음 순위의 두려움 하나는, 기록에 선택되지 못한 것이 잊혀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고, 결국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색연필 세트가 아예 없는 것보다, 몇가지 색깔의 색연필이 이빠진 듯 없어져버린 색연필 세트는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듯이, 일상의 기록도 아예 없는 것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이빠진 일기 조각들을 들추다보면

 이 기록이 내 인생에서 그렇게 기록할만한 것이었을까?
 이 기록 외의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일은 이토록 없었을까?
 대체 몇 해전 그 달은, 내가 무엇을 내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아무리 기억하려해도 기록되지 않은 것 중, 사소한 기억하나가 나를 위로해줄 수 없을 때,
 쓰다말은 시덥지 않은 일기장 한 조각은 나를- 더욱 외롭게 할 뿐이다.

 가장 바쁘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정작 가슴이 뛰어서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었는데!

 아무리 탄식한들, 아무리 자기합리화를 한 듯, 
 몇해전 일상의 일들은 내게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않는다.


 -

 며칠전에 내동생 석봉이가 방학동안 밀린일기를 개학 이틀전에 써야하는 상황에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일기를 매일 써서 얻을 수 있는 글쓰기 실력과 논술력을 포기한 대신,
 한-꺼번에 일기를 쓰기위한 기억력만큼은 지금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있어." 

 머리를 꽁하고 쥐어박으려는 제스쳐나 취하다 웃고 말았지만 
 정작 내가 매일 하는 일이다. 

 뉴욕에서의 매일 매일을 머리속에서 꽉 넣어 기억하려다가, 꽉차버린 메모리카드처럼 하나 지우고, 하나를 넣고 하다가,
어느 순간 반이나 날아가 있음을 느낀다. 더 없어질 기억들이, 깨달음들이, 마음 뭉클하게 감동했던 순간 순간들이, 이내 거의 흔적만 남기고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아파온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만 잘 적어놓아도 시대를 아우르는 멋진 책들이 될텐데. 하는 생각은 수도 없이 했다.

 내 이야기.
 나의 삶.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있고, 경이로움이 틀림없는데-
 다는 기억하지 못하게 생겼다. 나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할 수 없고, 어리석고, 해서는 안되는 일도 없더라는 것.

 벤자민의 일기장은 단, 몇장 안에 그의 인생을 다 넣어버렸으니까.

 그렇지 않았다 한들, 그가 허구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도 엿보지 못했을 인생이니
 그 기록들이 참 귀한 것이라는 진부한 깨달음이다.
 (참 매력없는 요약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우리 언니가 대뜸 John Legend 콘서트 티켓을 사놨다.

 " 강지은, 아무튼 너 이건 무조건 가야 돼."

 아마 나는 이말을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우리언니는 내 친구들이 다 부러워하지만, 난 그냥 우리 언니니까 제일 좋을 뿐이다.

 




 



by 芝恩 | 2009/02/16 23:59 | la vie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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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芝恩 at 2009/02/25 11:09

그러나 -
이 영화의 메인 케릭터, '벤자민'의 상징성은 세기에 걸쳐 회고 될 듯. 아마 고전이 될 수도.
감독과 브레드 피트의 선택 또한 아마도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길을 가다가 문득.
그러한 기대로 긴 시간의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을 듯. (요새 나는 왜 소녀의 감성이 아니라 시니컬 모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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